-
도시
신도시 60년 (26)
60년의 성과와 한계
신도시 60년은 국가가 산업화와 서울 집중, 주택난, 이주 갈등, 균형발전, 광역교통, 노후화를 도시공간으로 풀어보려 한 반복된 실험이었다. 성과도 실패도 같은 자리에서 되풀이됐다.
-
도시
신도시 60년 (25)
신도시는 어디에, 어느 행정구역에 있나
정조의 수원부터 3기까지 스물네 편을 왔다. 그런데 이 가운데 공식 세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1기와 2기, 3기뿐이다. 나머지는 계획도시사의 일부이거나 선례로만 들어온다.
-
도시
신도시 60년 (21)
3기 신도시, 서울에 더 가깝게
1기는 서울에서 20킬로미터, 2기는 30킬로미터 밖이었다. 3기는 10킬로미터 안쪽이다. 여섯 지구 34.46제곱킬로미터에 19만 3천 호가 들어선다. 첫 입주는 올해 12월 인천 계양이다.
-
도시
신도시 60년 (17)
판교·광교·고덕, 자족이 이미지가 된 사례
판교테크노밸리는 2023년 기준 1지구 1,277개 기업, 2지구 365개 기업이 들어섰다. 그런데 판교의 자족은 IT 고용이고 광교의 자족은 행정 기능이며 고덕의 자족은 산업과 국제화다. 같은 말이 아니다.
-
도시
광주대단지, 도시가 되기까지 (3)
1971년 8월 10일, 여섯 시간
부슬비 속에 5만 명이 모였고 여섯 시간 만에 흩어졌다. 그날 이후 도로가 뚫리고 출장소가 생기고 2년 뒤 성남시가 됐다.
-
도시
광주대단지, 도시가 되기까지 (2)
평당 2,000원의 약속과 16만 원의 고지서
평당 2,000원에 3년 거치 5년 분납으로 약속된 땅에 평당 8,000원에서 1만 6,000원을 일시에 내라는 통지가 왔다. 못 내면 징역이라는 경고가 붙었다.
-
도시
광주대단지, 도시가 되기까지 (1)
서울은 왜 15만 명을 광주군으로 보냈나
1960년대 서울 인구는 10년 만에 두 배가 됐다. 시민 셋 중 하나가 무허가 주택에 살았고, 서울시는 이들을 경기도 광주군으로 옮기기로 했다.
-
도시
신도시 60년 (16)
위례, 세 지자체에 걸친 신도시
위례는 서울 송파구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다. 주민의 생활권은 하나로 움직이지만 행정서비스와 학교 배정, 교통 민원, 기반시설 책임은 셋으로 나뉜다.
-
도시
신도시 60년 (15)
동탄1과 동탄2, 2기 안의 거대 생활권
동탄1은 9.0㎢에 4만 1,500호, 동탄2는 24.0㎢에 11만 6,500호다. 같은 동탄이지만 정책 시점도 규모도 도시의 중심도 다르다. 둘을 하나로 묶으면 어느 쪽도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다.
-
도시
신도시 60년 (14)
이름의 정치 — 화성에서 동탄, 송파에서 위례
한국토지공사는 화성신도시 대신 화성·동탄신도시를 강조했다. 이유는 분양이었다. 송파신도시는 위례가 됐고 김포양촌은 김포한강이 됐다. 이름이 바뀌는 순간 정책이 겨냥한 시장도 바뀐다.
-
도시
신도시 60년 (13)
당시 기사로 본 2기의 형성
2기 신도시는 공식 안내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기사를 보면 부동산 가격 급등과 난개발 논쟁, 강남 수요 대체, 투기 우려, 공영개발, 후분양, 교통 선투자 논쟁 속에서 만들어진 도시들이다.
-
도시
신도시 60년 (12)
2기는 몇 개인가 — 10개와 12개 사이
국토교통부는 수도권 2기 신도시를 10개로, LH는 아산과 대전을 더해 12개로 센다. 어느 쪽이든 판교와 위례만 보면 규모가 왜곡된다. 동탄2 하나가 분당보다 크다.
-
도시
신도시 60년 (11)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다섯 얼굴
분당은 강남 접근성으로, 일산은 서북부 축으로, 평촌·산본·중동은 기존 도시와의 밀착으로 읽어야 한다. 1기를 하나의 성적표로 평가하면 다섯 도시가 서로 다른 조건에 놓였다는 사실이 사라진다.
-
도시
신도시 60년 (10)
200만 호는 왜 그렇게 급했나
1기 신도시는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과정이었다. 계획 주택공급 약 29만 2천 호. 언제 발표됐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지었고 기반시설이 어떻게 따라왔느냐가 이 세대를 설명한다.
-
도시
신도시 60년 (9)
상계, 아파트와 천막이 같은 시기에 있었다
1985년 상계에 주공아파트 약 3만 가구 계획이 발표됐다. 그 자리에는 이미 서울에서 밀려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철거민들은 상계동에서 명동성당으로, 다시 부천 고강동으로 옮겨 갔다.
-
도시
신도시 60년 (8)
목동, 기록이 두꺼운 신시가지
목동 신시가지 개발 기록은 약 1만 권이 남아 있다. 결과만이 아니라 결정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드문 사례다. 같은 시기 철거민들은 100여 회의 시위와 농성 끝에 일부 권리를 뒤늦게 얻었다.
-
도시
신도시 60년 (7)
왜 서울 안에 신도시를 지었나
1기 신도시를 분당과 일산에서 시작하면 신도시사는 외곽 개발사가 된다. 그 전에 서울은 이미 자기 안에서 대규모 택지개발과 공영개발을 시험하고 있었다. 목동과 상계다.
-
도시
신도시 60년 (6)
섬을 육지로 만들고 청사를 밖으로 옮겼다
1970년대 서울은 없던 땅을 만들어 도시를 넣었다. 여의도는 매립으로, 잠실은 한강 물길을 막아서. 같은 시기 과천에는 정부 청사가 옮겨 갔다. 땅을 만드는 방법과 기능을 옮기는 방법이 함께 시험됐다.
-
도시
신도시 60년 (5)
울산·창원·구미, 공장이 먼저 선 도시
1960~70년대 산업기지도시는 공장 옆에 주거지를 붙인 것이 아니었다. 항만과 공업용수, 도로, 배후 주거, 지역 행정체계가 함께 움직였고 도시의 모양은 산업정책이 정했다.
-
도시
신도시 60년 (4)
강남은 조용히 생긴 신도시가 아니다
영동 개발은 서울 남쪽에 아파트를 지은 일이 아니었다. 다리와 고속도로, 토지구획정리, 공공기관과 학교 이전, 버스노선이 한 덩어리로 움직여 서울의 중심을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긴 사업이었다.
-
도시
1963년, 서울 대확장 (4)
1963년에 서울이 된 곳은 지금 어디인가
1963년 서울에 편입된 5개 군 84개 리는 오늘날 강남·서초·송파·강동·노원·도봉·중랑·구로·금천·관악·강서·양천이 됐다.
-
도시
1963년, 서울 대확장 (3)
버스, 세금, 학교 — 편입 첫해에 벌어진 일
1963년 1월 편입이 시행된 뒤 몇 달간 신문에 실린 것은 상징이 아니었다. 버스 노선과 요금, 보건소, 농업 진흥책, 그리고 세금이 싸다 비싸다는 진정이었다.
-
도시
신도시 60년 (3)
신도시라 불렸지만 서로 달랐다
국토교통부와 LH 설명은 1960년대에 현대적 신도시가 처음 지어졌다며 울산과 여의도, 영동, 성남을 나란히 든다. 그런데 이 넷은 도시를 만든 이유도 주민이 겪은 일도 전혀 달랐다.
-
도시
신도시 60년 (2)
정조의 수원은 신도시의 시작인가
국가유산청 해설은 수원 화성을 한국 최초의 계획 신도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군사와 행정, 상업을 한 도시에 묶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대한민국 신도시 정책의 출발점으로 옮기면 설명되지 않는 것이 생긴다.
-
도시
1963년, 서울 대확장 (2)
도민증이 시민증으로 바뀌던 무렵
1962년 11월 신문에 편입 예정지 주민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기대와 불안이 나란히 있었고, 그 기준은 도시계획이 아니라 수도와 버스, 세금과 학교였다.
-
도시
1963년, 서울 대확장 (1)
서울이 지금 크기가 된 날은 언제인가
서울 면적이 두 배 넘게 늘어난 1963년의 확장에는 날짜가 여러 개 있다. 구상이 알려진 날, 법이 공포된 날, 형식상 시행일, 그리고 주민이 체감한 날이 모두 다르다.
-
도시
신도시 60년 (1)
신도시를 읽는 세 개의 시간층
신도시라는 말은 분당·일산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울산과 영동, 목동과 상계를 거쳐 3기까지, 이 말은 시기마다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려 나왔다. 그 층위를 구분해야 신도시사가 읽힌다.
분야
도시
도시계획과 개발, 신도시와 도시의 형성을 생활권의 변화로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