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평당 2,000원이었다. 3년 거치 5년 분납이라고 했다. 그런데 1971년 여름 날아온 고지서에는 평당 8,000원에서 1만 6,000원이 적혀 있었고, 일시에 내라고 돼 있었다.
앞 편에서 광주대단지가 계획과 현장 사이의 큰 간극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봤다. 1971년 그 간극이 어디까지 벌어져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마지막으로 불을 붙였는지 본다.
1971년의 광주대단지
1970년 한 해 동안 15억 2,000만 원이 투입됐다. 3,500가구 2만여 명이 새로 왔다.
그해까지 갖춰진 것은 이랬다. 하루 4,000톤의 수돗물, 공동수도 100개, 공동우물 88개, 전기 1만kW, 학교 5개, 공장 7개. 취업한 사람은 3,000여 명이었다.
1971년 확충 계획은 더 컸다. 수원지를 1만 톤 늘리고, 전기를 4만 호에 공급하고, 버스를 83대에서 133대로 늘리고, 단지 안 도로 11km를 포장하고, 학교를 12개 신설하고, 시장을 5개에서 10개로, 공장을 8개에서 40개로 늘려 1만 4,000명의 취업을 알선한다는 것이었다.
계획은 언제나 컸다. 문제는 사람이 계획보다 빨리 왔다는 것이다.
계획과 실적의 표
1968년 계획과 1971년 실적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게 된다.
| 구분 | 계획(1968) | 실적(1971) |
|---|---|---|
| 철거 가구 | 6만 565채 | 3만 5,000채 |
| 토지 매입 | 350만 평 | 197만 7,000평 |
| 택지 조성 | 300만 평 | 196만 평 |
| 공장 유치 | 72개 소 | 46개 소 |
| 공장 취업 | 4만 명 | 1,823명 |
| 상수도 | 공동수도 400개·공동우물 1,855개 | 175개 소 |
| 학교 | 초·중·고 30개 교 | 5개 교 |
자료: 성남시사 50년사 제8권. 표는 도시교통저널이 재구성했다.
토지와 택지는 계획의 절반 이상을 채웠다. 그런데 공장 취업은 계획의 4.6%였다.
주거를 옮기는 일과 생계를 옮기는 일이 분리됐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하던 일을 두고 왔는데, 새 도시에는 일자리가 없었다.
1971년 10월 기준으로 14만여 명 가운데 경제활동인구는 4만 2,817명이었다. 고정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1만 6,700여 명, 일용노동자가 1만 5,600여 명, 실업자가 9,700명이었다.
땅을 사고파는 사람들
계획이 비어 있는 자리를 다른 것이 채웠다.
분양증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철거민 자격으로 분양증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팔고, 산 사람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1971년 전입자 약 16만 명 가운데 30%가 분양권을 사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땅값이 올랐다. 서울시는 유보지를 공매에 부쳤다. 투기가 붙었다.
여기서 서울시가 결정을 내렸다. 분양증 전매를 금지하고, 토지 대금을 일시에 걷기로 한 것이다.
고지서
1971년 여름 통지가 날아왔다.
평당 8,000원에서 1만 6,000원. 20평이면 16만 원에서 32만 원이었다. 일시 납부였다. 내지 않으면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경고가 붙었다.
앞서 약속됐던 조건은 평당 2,000원에 3년 거치 5년 분납이었다.
월수입 5,000원이 안 되는 가구가 수천 세대인 곳이었다. 16만 원은 그런 가구가 몇 년을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리고 그 땅은 이미 자기 집을 짓고 살고 있는 땅이었다.
거리에 이런 문구가 붙었다.
"백 원에 뺏은 땅, 만 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 불하 가격, 결사 반대!"
기름을 부은 고지서
그 위에 경기도가 건물 취득세 고지서를 보냈다.
취득세는 원래 면제해 주기로 약속했던 항목이었다. 주민들로 구성된 투쟁위원회는 이것을 서울시와 경기도가 문제를 풀기보다 자기들을 조롱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투쟁위원회는 8월 10일에 주민 궐기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네 가지 요구
주민들이 내건 요구는 네 가지였다.
- 철거민이든 입주민이든 구별하지 말고 단지 안 모든 대지 가격을 평당 2,000원 이하로 할 것
- 대지 불하대금을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게 할 것
- 앞으로 5년 동안 집과 관련된 모든 세금을 면제할 것
- 영세민 취로 사업장을 알선하고 구호대책을 세울 것
요구를 읽어 보면 성격이 드러난다. 토지 가격, 상환 방식, 세금, 일자리.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그 도시에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었다.
결렬된 협상
현장 공무원들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서울시에 알렸다. 서울시는 8월 9일 밤 8시가 넘어 최종완 부시장을 급히 보냈다.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다. 부시장에게는 토지 불하 가격 인하와 세금 면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성남시사는 그가 남긴 말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 당신더러 여기 와서 살라고 했소? 여기서 살지 않으면 될 것 아니요?"
주민들은 밤 11시까지 협상을 이어갔지만 얻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양택식 서울시장이 직접 현장에 와서 협상에 나선다."
부시장이 떠난 뒤 투쟁위원회는 확성기를 단 차량으로 단지를 돌며 이 내용을 알렸다.
"시장이 내일 11시에 이곳으로 오기로 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해서 우리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자."
다음 날은 8월 10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