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은 언제 생겼는가. 아파트가 들어선 때로 보면 답이 어긋난다. 다리가 먼저 놓였고 고속도로가 뒤따랐으며 땅값은 사람보다 먼저 움직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전시는 이 순서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한다. 1960년대 강북의 팽창, 1969년 제3한강교, 1970년 경부고속도로,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공무원아파트, 공공기관과 학교 이전,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철 2호선.

아파트는 이 목록의 한 칸일 뿐이다.

강북을 덜어내려고 강남을 만들었다

영동 개발의 목적은 강북의 과밀을 더는 것이었다. 도심 기능과 인구를 강남으로 옮기려 했고 그러기 위해 다리와 고속도로, 토지구획정리, 주택, 학교, 버스노선, 공공기관 이전을 한꺼번에 묶었다.

시작점은 1966년이다. 서울신문의 회고 기사는 그해 서울시가 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 일대를 토지구획정리 예정지로 지정한 것을 강남 개발의 출발로 설명한다. 그리고 1970년 영동 2지구 개발 발표와 상공부 청사 이전 구상이 땅값 상승의 계기가 됐다고 짚는다.

청사를 옮기겠다는 발표가 땅값을 움직였다. 청사가 실제로 옮겨지기 전이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오산 구간 개통 당시. 아치형 표지판 아래 빈 도로가 뻗어 있고 길가에 사람들이 서 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오산 구간 개통(1968년 12월 30일). 강남에 아파트가 서기 전에 길이 먼저 놓였다. 사진: 경기도청 /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길이 먼저 놓이고 사람은 마지막에 왔다

영동에서 벌어진 일은 세 갈래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기반시설이다. 제3한강교가 강북과 강남을 잇고 경부고속도로가 서울과 전국을 이었다. 강남은 처음부터 서울 안의 동네가 아니라 전국 고속교통망의 한쪽 끝으로 설계됐다.

둘째는 토지제도다. 영동 1지구와 2지구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농촌과 야산, 논밭을 도시 필지로 재편했다. 땅의 모양과 소유 관계가 통째로 바뀌었다.

셋째는 사회적 파장이다. 땅값이 급등했고 부동산 투기가 따라붙었다. 복덕방과 복부인이라는 말이 생겼고 8학군이 만들어졌으며 밤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강남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이미지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졌다.

세 갈래는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았다. 순서가 있었다. 1969년 제3한강교가 열렸고 이듬해 경부고속도로가 뚫렸다.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가 땅을 다시 그렸고 공무원아파트가 들어섰다. 공공기관과 학교가 옮겨 왔으며 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 2호선은 그 뒤였다.

길이 먼저, 땅이 그다음, 사람과 기관이 마지막이다. 이 순서를 뒤집어 읽으면 강남은 그냥 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동네가 된다.

1기 신도시와는 방향이 반대다

영동에는 신도시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도시사의 핵심 선행 사례로 다뤄야 하는 이유가 있다.

1기 신도시는 서울의 주택수요를 외곽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이었다. 분당과 일산은 서울 밖에 지어졌다. 반면 영동은 서울 안에서 중심 자체를 옮기는 장기적 공간 재편이었다.

그래서 영동을 "서울 남쪽에 새 주거지를 만든 일"로 줄이면 절반이 사라진다. 업무와 교통, 교육, 상업, 토지시장, 도시 이미지가 한꺼번에 이동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도시개발이 기반시설 투자와 토지 재편, 공공기관 이전, 교육정책, 부동산 기대심리를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방식은 여기서 완성됐다.

교통을 먼저 놓는 방식도 여기서 나왔다

또 하나 짚을 것이 있다. 영동은 뒷날 신도시가 쓰게 될 "교통 선투자" 논리와 이어진다.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가 먼저 강남의 가능성을 키웠다. 토지구획정리와 공공기관·학교 이전은 그다음이었다. 3기 신도시가 GTX와 간선급행버스, 역세권 개발, 자족용지 같은 말을 앞세우는 것도 결국 교통과 토지이용을 한꺼번에 묶으려는 같은 방식이다.

차이는 하나다. 영동에서는 그 과정에 부동산 투기와 계층 이미지가 아주 강하게 결합했다. 교통이 열리면 땅값이 오른다는 경험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 경험은 지금도 신도시 발표가 나올 때마다 되살아난다.

이 지역이 서울에 들어온 것은 1963년이다. 그때까지 강남구 일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고 서초구 상당 부분은 시흥군 신동면이었다. 편입된 지 몇 해 만에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면, 행정구역이 바뀌는 것과 도시가 바뀌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 드러난다.

다음 편에서는 같은 시기 다른 갈래를 본다. 공장이 먼저 서고 도시가 그 뒤에 만들어진 곳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