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도 송파도 노원도 강서도, 1962년까지는 서울이 아니었다. 경기도 광주군과 양주군, 김포군, 시흥군, 부천군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들이 서울로 들어온 것이 1963년의 대확장이다. 그런데 "언제 서울이 됐느냐"고 물으면 답이 하나로 나오지 않는다. 날짜가 여러 개이고 각각이 다른 것을 가리킨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가장 이른 흔적은 1961년 10월 13일 동아일보 기사다. 제목이 이렇다.

대서울 건설에 박차 명년내로 행정구역 대확장을 구상 인구 300만 목표 세종로 중심 반경 15킬로까지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다. 1961년에 이미 "대서울"과 행정구역 대확장이 공개 언론에 등장해 있었다. 1963년의 확장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온 행정 조치가 아니라 1년 넘게 공적 언어 속에 있던 구상이었다.

1962년에 들어서면서 논의가 빨라진다. 7월 27일 기사는 행정구역 변경 원칙이 정권 핵심에 보고되고 있다고 전하는데 제목에 이미 "내년 선거구와 관련?" 이라는 의혹이 붙어 있다. 행정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읽히는 사안이었다는 뜻이다.

10월 4일에는 조정안이 완성됐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런데 10월 13일 기사 제목은 「서울확장은 보류」다. 일주일 뒤인 10월 20일에야 「각의서 의결 서울시 확장안」이 실린다. 한 번 미뤄졌다가 다시 처리된 것이다.

기관 연표는 1962년 9월 21일 서울시가 경기도 5개 군에서 6개 면 60개 리 전부와 5개 면 일부 24개 리를 편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고 적고 있다.

종로 일대 도심 거리. 고층 건물과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종각 일대 종로(2025년 12월). 1963년 1월 1일에 지금 크기의 서울이 됐다. 사진: DtSeoul / Wikimedia Commons / CC0

그래서 날짜가 여러 개다

당시 신문과 국가법령정보센터, 서울역사편찬원 연표를 겹쳐 보면 과정은 이렇게 흘러간다.

"대서울" 구상이 공개 기사에 처음 등장한 것이 1961년 10월 13일이다. 이듬해 7월 27일 변경 원칙이 정권 핵심에 보고됐고 9월 21일 서울시가 편입계획을 발표했다. 10월 13일 각의에서 한 차례 보류됐다가 10월 20일 의결됐고 11월 14일 최고회의 상임위가 관련 7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서부터가 헷갈리는 지점이다. 법률 공포는 1962년 11월 21일, 법률의 형식상 시행일은 12월 12일, 그런데 실질적 편입 시행은 1963년 1월 1일이다.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은 1962년 11월 21일 제정·공포됐고 형식상 시행일은 12월 12일이다. 그런데 서울역사편찬원 연표는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고 적는다.

둘은 모순이 아니다. 앞의 것은 법률의 형식상 효력이고 뒤의 것은 서울시 차원에서 행정이 실제로 넘어간 시점이다. 층위가 다르다.

11월 21일은 "처음 알려진 날"이 아니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한가.

1962년 11월 21일 내무장관 담화와 법령 공포를 이 사건의 시작점으로 보면, 정부가 어느 날 발표하고 주민은 통보받았다는 그림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그 시점에는 이미 1년 넘게 공개 논의가 진행된 뒤였다.

11월 21일은 처음 알려진 날이 아니라 법적·공식적으로 마감된 날에 가깝다.

다만 이 공개 논의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시민 공청회나 의회 토론의 형식은 아니었다. 위에서 만들어진 정책이 신문과 기관 발표를 통해 단계적으로 알려지는 방식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서울은 1963년 1월 1일에 확장됐다"는 문장은 틀리지 않지만 많은 것을 지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서울 대확장은 1961년부터 공개 구상으로 등장했고, 1962년 하반기에 정책과 법률 절차를 거쳤으며, 1963년 1월 1일을 전후해 실질적 편입으로 체감됐다.

다음 편에서는 그 체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편입을 앞둔 주민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걱정했는지를 당시 기사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