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10일은 부슬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성남출장소 뒷산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날
오전 9시. 15만 광주대단지 주민 가운데 3만 명 이상이 모였다. 궂은 날씨였다.
오전 10시. 군중은 5만 명을 넘었다. 요구는 전날 투쟁위원회가 정리한 그대로였다. 토지 불하 가격을 낮추고 생계 대책을 세우라는 것.
오전 11시. 약속된 시각이었다. 양택식 서울시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전날 밤 부시장이 남기고 간 것은 이 약속 하나였다. 그것마저 지켜지지 않자 불신과 분노가 터졌다.
오전 11시 45분. 주민들이 서울시 대단지 사업소와 성남출장소 쪽으로 이동했다. 차량에 불이 붙고 건물이 부서졌다.
오후 2시. 경찰 기동대 700여 명이 투입됐다. 최루탄 100여 발이 발사됐다. 차량 22대가 파괴되거나 불탔다.
오후 5시 20분. 양택식 서울시장이 현장에 도착해 주민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 군중이 해산하고 복구가 시작됐다.
주민 50여 명과 경찰 82명이 다쳤다. 재산 피해는 약 2,000만 원으로 집계됐다.
여섯 시간이었다.
그리고 두 달
시장이 수용을 발표한 뒤 조치가 이어졌다.
대지값은 평당 2,000원으로 정해졌고 5년 연부상환이 적용됐다. 취득세는 면제됐다. 밀가루 500포대가 배급됐고, 1972년 3월까지 구호양곡 1,808톤이 들어갔다. 1973년까지 56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 다시 세워졌다.
행정도 들어왔다. 1971년 9월 1일 성남출장소가 설치됐다. 파출소는 4곳에서 8곳으로 늘었다.
길도 뚫렸다. 1971년 9월 3일 경부고속도로 서초동 나들목과 연결되는 대곡로가 개통했다. 길이 8km, 폭 30m였다. 버스 80대가 다니기 시작했다. 을지로6가까지 1시간 30분 걸리던 것이 40분으로 줄었다. 변전소가 연결되면서 1만 5,000kW가 공급됐다.
요구했던 것들이 사건 뒤에 왔다.
땅값과 재판
사건은 다른 것도 바꿨다.
투기가 꺼졌다. 유보지 1만 5,264평을 공매에 부쳤으나 팔린 것은 2,600평이었다. 땅값은 그해 봄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건 후 80% 폭락했다는 기록도 있다.
재판이 열렸다. 1972년 피고인 21명 가운데 실형은 2명, 무죄가 1명, 나머지 18명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일자리는 다시 계획됐다
가장 크게 어긋났던 항목이 공장 취업이었다. 계획 4만 명에 실적 1,823명.
사건 뒤 이것이 다시 핵심 대책이 됐다. 1973년에는 77개 공장이 입주 지정을 받았고, 이후 성남산업단지 1·2·3공단 준공으로 이어졌다.
1973년 기준으로 공식 인구는 16만 5,000명, 실제로는 18만에서 19만 명으로 추산됐다. 44개 공장에 1만 5,000명이 일했다. 취로사업에 하루 2,000명이 나갔다. 그래도 실업률은 20~30%로 추정됐다.
1973년 7월 1일, 성남시
정부는 1973년 7월 1일 성남을 시로 승격했다. 명분은 서울 외곽 위성도시 육성, 수도권 인구 집중 억제, 산업·시설 이전이었다.
초기 행정조직은 1실 10과 2사업소 2출장소 18개 동사무소였다.
이 승격을 자연스러운 행정 절차로만 보기는 어렵다. 1971년의 항의를 질서 회복으로만 처리한 것이 아니라, 외곽으로 밀어낸 주민의 주거와 생계, 행정서비스를 별도의 도시정부가 맡게 만든 전환이었다.
2년 뒤인 1975년 성남은 이렇게 바뀌었다. 도로 총연장 232km, 하루 급수능력 2만 5,000톤, 주택 2만 9,000채. 버스는 3대에서 198대가 됐다. 인구는 약 30만 명, 경제활동인구는 10만 명을 넘었다. 초등학교 16곳, 중학교 7곳, 고등학교 7곳, 전문학교 1곳이 있었다.
이름이 바뀌는 데 걸린 시간
이 사건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는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았다.
1971년 8월 1일부터 31일까지 광주대단지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중복을 뺀 65건이 나온다. 그중 절반 이상이 8월 10일부터 13일 사이에 몰려 있다. 당시 언론이 붙인 말은 난동과 폭동이었다.
명칭은 이렇게 바뀌었다.
| 시기 | 명칭 |
|---|---|
| 1971년 | 난동·폭동 |
| 2021년 | 8·10성남(광주대단지) 민권운동 |
| 2024년 | 8·10성남항쟁 |
자료: 성남시사 50년사 제8권
53년이 걸렸다.
성남이라는 도시가 가진 시간층
성남을 신도시 역사에 넣을 때는 구분이 필요하다. 한 행정구역 안에 서로 다른 시간층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 시간층 | 시기와 성격 |
|---|---|
| 광주대단지·원도심 |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이주정착지와 시 승격 |
| 분당 | 1989년 이후, 1기 신도시 |
| 판교·위례 | 2000년대 이후, 2기 신도시 |
이 구분이 없으면 성남은 쉽게 "성남은 분당·판교"로 납작해진다. 정확히는 한 지방자치단체 안에 광주대단지의 이주사와 분당의 1기 신도시사, 판교·위례의 2기 신도시사가 겹쳐 있다.
성남시사 50년사 제29권은 성남의 공간구조를 행정구역이 아니라 개발 시기와 지형, 사회경제적 속성, 통행과 생활권으로 나눠 읽어야 한다고 정리한다.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이 구분은 현재의 정책에도 걸린다.
노후계획도시 정비를 다루는 법제는 20년 이상 된 대규모 계획도시의 재정비를 대상으로 한다. 성남은 원도심과 분당, 판교, 위례가 서로 다른 이주와 개발의 시간층을 갖는 도시다.
그렇다면 정비 논의도 건물이 얼마나 낡았는지만이 아니라 행정이 어떤 책임을 졌는지, 주민이 어떤 이주를 겪었는지, 기반시설 격차가 어디서 벌어졌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1971년 8월 10일의 여섯 시간은 그 격차가 한 번 터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