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서울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없던 땅을 만들어 그 위에 도시를 넣거나, 있던 기능을 서울 밖으로 내보내거나. 여의도와 잠실이 앞의 방법이고 과천이 뒤의 방법이다.
앞 편에서 본 산업기지도시가 생산기능을 어디에 놓을지의 문제였다면, 이 셋은 다른 질문에서 나왔다. 서울의 팽창을 어떤 공간구조로 받아 낼 것인가.
섬을 다시 만들었다
서울기록원은 여의도 개발을 1968년 밤섬 폭파에서 시작한다. 이어 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모형과 윤중제 공사,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준공이 이어진다.
밤섬을 폭파해 나온 돌과 흙으로 제방을 쌓았다. 그 제방이 윤중제다. 물에 잠기던 모래섬을 둘러막아 쓸 수 있는 땅으로 바꾼 것이다.
여의도는 발견된 땅이 아니라 만들어진 땅이다. 제방과 매립, 교량, 공동구, 고층 아파트, 업무와 정치 기능이 한 계획 안에 들어갔다. 이후 국회의사당이 들어서고 증권과 금융, 방송과 업무 기능이 붙으면서 여의도는 주거지가 아니라 서울의 새 업무 중심지가 됐다.
물길을 막아 섬을 육지로 만들었다
잠실은 더 근본적인 방법을 썼다. 땅을 매립한 것이 아니라 강의 흐름 자체를 바꿨다.
서울기록원 자료는 1971년 4월 16일 잠실도와 송파 사이의 한강 지류가 막히면서 잠실섬이 육지가 됐다고 기록한다. 서울시는 이렇게 육지가 된 잠실에 새 시가지와 종합체육시설을 세우려 했다.
김백영의 잠실 올림픽타운 연구는 잠실지구 개발이 1970년대 초 본격화됐다고 본다. 1974년 이후에는 단순한 주거타운을 넘어 국제 스포츠경기와 미래 이상도시를 겨냥한 종합계획 대상으로 다시 설정됐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잠실은 한 가지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파트 개발이면서 한강 개발이었고 강남 개발의 일부였으며 스포츠시설 계획이었고 올림픽 도시 만들기였다. 하나의 땅 위에 다섯 가지 목적이 겹쳤다.
서울 밖으로는 청사를 보냈다
과천은 성격이 다르다. 산업도시도 아니고 서울 안의 신시가지도 아니다. 정부 기능을 서울 중심부 밖으로 옮기는 행정기능 분산 도시다.
국가기록원은 1982년 7월 19일 보건사회부를 시작으로 정부 각 부처의 과천 이전이 본격화됐다고 정리한다. 청사가 옮겨 가고 그 청사에서 일할 사람들이 살 주거지가 함께 계획됐다.
이 방식은 뒷날 세종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이어진다. 다만 두 도시의 성격은 다르다. 과천은 서울권 안에서의 행정기능 분산이다. 세종은 수도권 집중 완화를 명시적으로 내건 국가균형발전형 행정도시다. 옮기는 거리가 다르고 옮기는 이유가 다르다.
과천이 서울 생활권 안에 남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청사는 옮겨 갔지만 서울과의 연결은 끊기지 않았다. 그래서 과천은 독립된 도시라기보다 서울의 행정 기능을 나눠 가진 위성도시로 자리 잡았다. 세종이 부딪힌 문제 가운데 상당수는 그 연결을 의도적으로 끊으려 했기 때문에 생긴다.
세 도시가 남긴 것
이 셋을 나란히 놓으면 1970년대 서울이 쓴 방법이 보인다.
땅이 모자라면 만들었다. 여의도에서는 제방을 쌓았고 잠실에서는 물길을 막았다. 국가가 지형을 바꿀 수 있다고 전제한 시기다. 지금이라면 환경영향평가와 하천 관리 절차를 먼저 통과해야 할 일들이 그때는 계획과 시공의 문제였다.
기능이 넘치면 옮겼다. 과천으로 청사를 보낸 방식은 뒷날 세종과 혁신도시, 도청이전신도시로 반복된다.
그리고 두 방법 모두 주택은 결과였지 목적이 아니었다. 여의도의 시범아파트도, 잠실의 아파트 단지도, 과천의 주거지도 그곳에 들어설 다른 기능을 위해 따라온 것이다.
주택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1989년부터다. 다음 편에서는 그 앞 단계, 서울이 자기 안에 신도시를 지어 본 1980년대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