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안내표는 결과만 보여준다. 면적과 호수, 인구, 개발기간. 그런데 그 숫자가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표에 없다. 당시 신문을 보면 2기 신도시가 계획표가 아니라 논쟁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2000년 12월 — 시작은 "더 짓자"가 아니었다
첫 문제의식은 공급 확대가 아니었다.
2000년 12월 보도에는 수도권 난개발을 막기 위해 판교 등 신도시 개발을 늦출 이유가 없다는 건설교통부 장관 발언이 실린다.
"무질서한 개발을 계획개발로 바꾸자"가 먼저였다. 1990년대의 준농림지 난개발이 배경이었다. 신도시는 그 대안으로 호출됐다. 2기를 단순한 주택공급 확대로만 읽으면 이 출발점이 사라진다.
2004년 12월 — 판교는 기대와 우려를 함께 안고 있었다
2004년 12월 기사는 판교의 조성과 분양 세부안을 다룬다. 판교가 2001년 12월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됐다는 사실과 함께 녹지율, 신분당선, 교통 지연 우려가 같이 보도된다.
친환경과 첨단, 강남 접근성이라는 기대와 입주 초기 교통 우려가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나중에 실제로 문제가 된 것도 그 지점이다.
2005~2006년 — 위례는 원래 송파신도시였다
2005년 8월 보도는 8·31 대책의 공급 카드로 송파신도시가 추진된다고 전한다. 거여지구의 군부대와 골프장 부지, 200만 평, 5만 가구 구상이 함께 실렸다.
위례의 전신은 강남 집값 안정과 강남권 주택수요 흡수 카드였다.
이듬해 4월에는 윤곽이 더 나온다. 205만 평, 4만 6천 가구, 후분양, 임대주택 비중이 큰 공영개발형 구상이었다.
여기서 긴장이 드러난다. 강남 대체와 서민 주거안정이라는 두 목표가 처음부터 한 사업에 묶여 있었다. 강남 수요를 흡수하려면 그만한 입지와 상품이어야 한다. 반대로 서민 주거안정을 하려면 임대 비중과 분양가 통제가 필요하다. 방향이 반대다.
2006년 4월 — 화성이 동탄이 된 이유
이름 얘기가 나온 것도 이때다.
2006년 4월 보도에 따르면 한국토지공사는 "화성신도시"보다 "화성·동탄신도시"라는 명칭을 적극 활용하려 했다. 기사는 그 이유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이미지가 분양에 줄 악영향을 들었다.
행정지명이 아니라 도시 이미지와 분양 브랜드의 논리가 이름을 정했다. 이 문제는 다음 편에서 따로 다룬다.
2006년 10월 — "수요가 있는 곳인가"
검단이 확정 국면에 들어서면서 논쟁의 성격이 바뀐다.
당시 기사들은 검단이 분당급 규모에 가깝지만 강남 수요 분산 효과에는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2기 후반부의 쟁점은 더 이상 "얼마나 지을 것인가"가 아니었다. "수요가 있는 곳에 짓는가"였다. 공급 확대와 수요 적합성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6월 — 동탄2와 선교통 후입주
11·15 대책의 후속으로 "분당급 신도시" 확보 방침이 나오면서 동탄2 개발방안이 발표된다.
동탄1 동측에 대규모 주택과 첨단 비즈니스 용지가 배치됐다. 여기서 선교통 후입주 원칙이 제시된다. 교통을 먼저 놓고 사람을 들이겠다는 것이다.
1기에서 입주와 기반시설이 어긋났던 경험이 원칙으로 정리된 순간이다. 이 원칙이 실제로 지켜졌는지는 3기 신도시를 다룰 때 다시 확인한다.
2007년 8월 — 송파에서 위례로
송파·거여 택지개발지구의 공식 명칭이 위례 택지개발지구로 바뀐다는 보도가 나온다.
송파신도시라는 정치적이고 시장적인 이름에서 역사지명에 기반한 광역지구명으로 옮겨 간 것이다. 이 지구가 서울 송파구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름 변경은 단순한 작명 문제가 아니다.
2008년 5월 — 고덕은 주택만이 아니었다
평택 고덕은 국제화계획지구와 글로벌교육문화타운, 자족형 신도시, 첨단산업단지 구상과 함께 보도된다.
고덕은 주택공급형 2기와 목적도시형 계획도시의 중간에 있다. 평택항과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조건이 함께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덟 해 동안 성격이 바뀌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의 기사를 이어 보면 2기가 한 가지 정책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판교는 난개발 방지와 강남 접근성에서, 송파와 위례는 강남 수요 대체와 공영개발에서, 동탄은 명칭과 도시 이미지에서, 동탄2는 수도권 남부의 거대 자족도시 구상에서, 검단은 서북부 공급 확대와 수요 적합성 논쟁에서, 고덕은 국제화와 산업과 교육 기능의 결합에서 출발했다.
같은 세대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사업이 여덟 해에 걸쳐 쌓였다. 2기를 하나의 정책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