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도시의 역사를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 물음에 가장 먼저 나오는 답이 정조의 수원이다. 국가유산청 해설은 수원 화성을 한국 최초의 계획 신도시라고도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 표현을 그대로 대한민국 신도시사의 출발점으로 옮기면 설명되지 않는 것이 생긴다. 이 연재는 수원을 시작점이 아니라 전사(前史) 로 둔다. 왜 그렇게 나누는지가 이 편의 내용이다.
도시를 옮기고 성을 쌓았다
1789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다.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1794년 1월이고 완공은 1796년 9월이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2년 8개월이 걸렸다.
국가유산청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5,744m, 성이 감싼 면적은 130ha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작은 신도시 한 지구쯤 되는 크기다.
설계는 정약용이 맡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문서는 실학의 대표적 학자인 그의 설계가 치밀한 계획과 주거·방어 기능의 결합, 최신 과학 지식의 적용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적었다.
군사·행정·상업을 한 도시에 묶었다
유네스코가 이 성의 가치를 설명하며 든 대목이 하나 있다.
화성은 군사와 정치, 상업 기능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중국과 일본의 성곽과 달랐다.
이 문장이 중요하다. 성을 방어시설로만 짓지 않고 행정 중심과 상업 육성을 함께 얹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등재기준 (ⅲ)은 이를 "전통적 축성 방식에 혁신적 배치를 결합해 방어·행정·상업 기능을 수행하게 했다"고 정리한다.
주택과 교통, 자족기능, 행정기능을 한 도시 안에 묶으려 하는 현대 신도시와 구조가 같다. 도시를 자연스럽게 자라게 두지 않고 국가가 목적을 정해 배치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등재기준 (ⅱ)는 이 성이 한국의 건축과 도시계획, 조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적었다.
기록이 남아 도시가 되살아났다
수원 화성이 계획도시로 불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록이다.
축성이 끝난 뒤 1801년에 『화성성역의궤』가 발간됐다. 국가유산청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는 축성 계획과 제도, 법식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와 용도, 예산과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까지 적혀 있다.
이 기록이 실제로 도시를 되살렸다. 한국전쟁 때 장안문과 창룡문이 완전히 파괴되고 성벽 일부가 헐렸는데 1964년 시작된 복원이 바로 이 의궤에 담긴 정보에 근거해 진행됐다. 유네스코는 그 복원이 베니스헌장과 나라문서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며 지금도 진정성이 유지된다고 판단했다. 1997년 12월 세계유산에 오른 근거 가운데 하나다.
누가 얼마를 받고 어떤 자재로 지었는지가 200년 뒤 복원의 설계도가 됐다. 오늘날 공공 개발사업의 기록이 그만큼 남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다른가
여기까지만 보면 수원을 신도시사의 첫 장으로 놓아도 될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첫째는 제도다. 현대 신도시는 택지개발촉진법 같은 법률과 지구 지정, 보상, 분양이라는 절차 위에서 움직인다. 그 절차가 누구를 어떻게 밀어내고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집을 파는지가 신도시사의 핵심 쟁점이다. 조선 후기의 축성에는 그 제도가 없다.
둘째는 경제와 기술의 맥락이다. 현대 신도시를 밀어붙인 것은 산업화와 인구 집중, 주택 가격이었다. 아파트라는 주거 형식과 대량 시공 기술, 광역철도가 전제된 도시다.
셋째는 국민국가라는 틀이다. 지금의 신도시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민간 시행사가 얽혀 결정된다. 그 힘의 배치가 도시의 모양을 만든다.
수원을 길게 다루면 이야기의 중심이 대한민국 도시정책사에서 조선 후기 도시사로 옮겨 간다. 그러면 정작 물어야 할 것 — 왜 1960년대부터 국가가 반복해서 도시를 새로 지었는가 — 이 뒤로 밀린다.
성벽은 지금 아홉 군데 끊겨 있다
이 도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보면 시대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유네스코 문서는 화성이 원래 48개 시설로 이루어졌고 그중 일곱 개가 홍수와 전쟁으로 사라졌다고 적는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덧붙인다.
굽이치는 성벽은 도시의 교통망을 수용하기 위해 아홉 군데가 뚫렸다.
성이 도로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같은 문서는 급격한 도시화로 사대문이 매연과 차량 진동에 노출돼 있으며 이것이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00년 전 계획도시는 지금 현대 도시교통과 부딪히는 자리에 서 있다. 이것이야말로 수원 화성이 현대 신도시사의 기원이 아니라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계획도시가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시작점을 어디로 잡느냐가 무엇을 바꾸나
이 구분은 말장난이 아니다. 시작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신도시사가 답해야 할 물음이 달라진다.
수원부터 시작하면 이야기는 "한국은 오래전부터 계획도시를 지어 왔다"가 된다. 1960년대부터 시작하면 이야기는 "국가가 왜 반복해서 새 도시를 답으로 골랐는가"가 된다. 뒤쪽 물음이라야 울산과 영동, 성남, 과천, 목동, 상계, 그리고 1·2·3기가 하나의 흐름으로 읽힌다.
그래서 이 연재는 수원 화성을 세 가지 용도로만 쓴다. 계획도시적 상상이 오래됐다는 전사, 도시가 정치적 기획과 공간 설계의 결합물이라는 설명, 그리고 현대 신도시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참조점이다. 선례와 기원은 다른 말이다.
본론은 1960년대에서 출발한다. 산업화와 서울의 팽창이 계획적 개발을 밀어붙이던 시기다. 다음 편에서는 그때 신도시라 불린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서로 달랐는지부터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