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서울 인구는 244만 명이었다. 1970년에는 552만 명이 됐다. 10년 만에 두 배가 넘었다.

지금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1960년대까지 논밭과 야산이 있었다. 그곳에 몇 년 사이 수만 가구가 들어섰다. 이유를 알려면 그 시기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봐야 한다.

셋 중 하나가 무허가 주택에 살았다

전국 인구는 1955년 약 2,150만 명에서 1960년 2,500만 명을 넘었고 1967년에는 3,000만 명을 넘어섰다. 1960년 평균 출산율은 6.3명이었다.

그 인구가 서울로 모였다. 1960년 244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963년 325만 명, 1966년 377만 명, 1968년 433만 명, 1969년 478만 명을 거쳐 1970년 552만 명이 됐다.

도시가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성남시사 50년사 제8권에 따르면 1966년 서울 인구 약 380만 명 가운데 127만 명이 무허가 주택에 살았다. 셋 중 하나다.

기반시설은 더 뒤처졌다. 1960년 상수도 보급률은 17%였고, 1970년 하수도 보급률은 27.9%였다. 판잣집에 사는 가구의 약 60%가 두 평에서 네 평짜리 방 한 칸에서 살았다.

1969년 조사에서 하천부지에 지어진 판잣집만 서울 시내에 1만 채가 넘었다. 동대문구 4,166채, 성동구 3,401채, 성북구 2,133채 순이었다.

물이 밀어낸 결정

계기는 물이었다.

1966년 대홍수로 전국에서 189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실종됐다. 이재민은 20여만 명, 그중 서울에서만 10만 명이 나왔다. 주택 2만 채가 물에 잠겼고 피해액은 2,500억 원을 넘었다. 한강 인도교 수위가 12m를 넘었다.

하천부지 판잣집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떠올리면 이 홍수가 무엇을 드러냈는지 알 수 있다. 물이 차오르는 땅에 도시 빈민이 살고 있었다.

서울시는 무허가 건물 13만 6,650동 가운데 7만 6,650동을 개량하고 6만 동은 시민아파트로 처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판잣집 18만 채 중 5만 채는 서울 밖으로 옮기기로 했다.

인구 50만 명의 도시를 만든다는 구상

옮길 곳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이 선정됐다.

초기 구상은 크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56억 원을 투자해 인구 50만 명을 수용하는 행정도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1968년 이주계획을 보면 수진리와 창곡리, 탄리, 단대리, 상대원리를 포함해 250만 평을 확보하고 4만 8,000가구 20만 명을 옮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임야는 평당 150~180원, 논밭은 평당 300~400원으로 잡아 토지비를 약 6억 원으로 계산했다.

교통 계획도 있었다. 왕십리에서 수진리까지 21.3km 전철을 놓고, 일본 차관 190억 원을 들여 4량짜리 차량을 3분 간격으로 운행해 한 번에 1,000명을 실어 나른다는 구상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신도시였다.

계획과 현장의 간극

문제는 시작부터 벌어졌다.

1969년 계획 예산은 16억 원이었지만 실제 확보된 것은 4억 5,000만 원이었다. 계획한 토지 100만 평 중 매입한 것은 10만 평이었다. 10만 세대를 옮긴다고 했으나 그해 이주한 것은 2,450세대였다.

그런데 철거는 계획대로 진행됐다. 1969년 철도 주변 무허가 건물 3,057채와 하천부지 판잣집 1만 1,657채가 대상이 됐고, 그해 여름에만 3,634채가 헐렸다.

살던 곳은 예정대로 사라졌고, 갈 곳은 예정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1969년 5월 첫 48세대 154명이 도착했다. 그해 안에 2,313세대 1만 1,133명이 왔다. 불도저가 하루 평균 20대, 많을 때는 137대까지 투입됐지만 사람이 오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도착한 곳의 풍경

1970년 8월 광주대단지에는 8,892세대 4만 1,915명이 있었다.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는 숫자에 남아 있다.

  • 자기 집이 있는 가구 3,250가구(37%)
  • 집을 짓는 중인 가구 2,879가구(32%)
  • 천막에 사는 가구 1,533가구(18%)
  • 임시 수용 상태 1,230가구(13%)

같은 해 6월 탄리 조사에서는 4,326세대 중 1,700세대가 무주택이었고, 2,450세대는 월수입이 5,000원이 되지 않았다. 직업은 막노동 38%, 무직 33%, 상업 19%였다.

1970년 한 해에만 1만 3,629가구 7만 3,995명이 이주해 왔다. 그중 8,211가구가 날품으로 생계를 이었다.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있었다. 1,800만 원을 들여 부지 1,000평에 건물 351평 규모의 가내공업센터를 짓고 연간 스웨터 18만 8,000벌을 생산해 36만 달러를 벌겠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빈곤을 옮긴 것

여기까지가 1971년 8월 이전의 상황이다.

성남시사 50년사 제8권은 이 시기를 도시정책의 불일치로 정리한다. 계획은 대규모 이주와 공장 유치, 생업 기반을 전제했지만 현장에서는 주택지 조성과 상하수도, 교통, 일자리, 행정서비스가 동시에 부족했다.

광주대단지는 서울 밖에 만든 주거지가 아니었다. 서울의 빈곤을 외곽으로 옮기면서 생존 기반을 제때 붙이지 못한 계획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상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무엇이 1971년 8월의 도화선이 됐는지를 본다.